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노론 음모론 (문단 편집) === 조선후기 정치사의 흐름에 대한 인식의 부족 === 조선후기 정치사에서 붕당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지연과 학연을 근거로 하는 붕당과는 별개로 18세기 부터는 정치적 상황에 따른 결정이 붕당보다 우선시되는 경우가 많다. 당장 [[영조]] 때만 해도 [[탕평책]]에 대한 입장으로 탕평파라는 새로운 정파가 나타났으며, 같은 당 내에서도 준론과 완론으로 나뉘어 심지어 노론 완론은 소론 완론과 더 친밀 했고 노론 준론과는 앙숙이 되었다. [[정조(조선)|정조]] 때는 [[노론]]과 [[소론]]보다 시파와 벽파가 더 중요하였다. 즉 영정조 때만 되어도 노론과 소론, 남인과 북인이라는 당색보다 경종 당시 대리청정 논란에 대한 입장, [[임오화변]]에 대한 입장, 탕평책에 대한 입장 등 개인의 정치적 입장이 더욱 중요해진 것이다. 실제로 같은 가문의 형, 동생이 노론과 남인으로 나뉘는 경우도 있었고,[* 나주 나씨의 경우나 경종 시기 사촌이였으나 소론 조태구-노론 조태채 집안같은 경우가 있다.] 소론이 노론으로 당색을 바꾸는 경우도 있었으며,[* 반남 박씨, 경북 일대 유림들의 경우] [[송시열]]이나 윤휴, 윤증, 박세채같이 당색이 달라도 일가끼리 서로 혼인하는 경우도 많았다. 이 외에도 마찬가지로 조선 초기에도 훈구파와 사림파가 서로 대립했지만 그들 가운데도 가족 관계를 맺은 일이 많으며 고려 때도 권문세족과 신진사대부가 대립했지만 그들 또한 가족관계로 연결되는 경우가 많았다. 또 문벌귀족 가문과 신진세력 가문이 혼인을 한 경우가 많았을 정도다. 간단히 말하자면 18세기 이후로 노론이니 소론이니 남인이니 하는 당색은 각 가문의 전통 정도로만 남아 있었고, 그보다는 국왕의 정치적 입장에 대해서 어떠한 입장을 취하느냐가 더 중요했던 것이다. 그렇지 않고 각 당색이 마치 고정되어 절대 불변하는 것인양 노론 음모론을 들이대는 것은 조선후기 정치사에 대한 인식의 부족을 보여준다. 그리고 당내 온건파로 활동한 사람들도 상대당의 친인척과 사돈 혈육의 정이 있어서 상대당을 가혹하게 대하지 못했다. 그리고 죽을 위기에 빠지면 형을 강등해 달라고 청원하였다. 그리고 정조 시기에서 심환지가 강경하고 비타협적인 반면, 노론이었던 [[김종수(조선)|김종수]]와 소론이었던 [[서명선]]은 [[채제공]]을 배타하는 면모는 같았지만 서로 사이는 나쁘지 않았다. 노론 시파인 정민시와 남인 시파인 [[채제공]] 또한 당파는 달랐지만 정책의 궤를 같이 하고 있어 노론 벽파가 집권시 둘다 세트로 관직이 추탈되었다. 그리고 한 당파가 다른 당파를 찍어내리면 당파내에서 분열이 일어난다. 최후의 주도권을 잡은 노론도 벽파와 시파로 분열했고 서인과 남인은 초반에 사이가 좋았다가 숙종 이후 철천지 원수가 되버리고 서인에 분열된 노론과 소론도 서로 죽일놈이 된 것은 경종 이후였다. 그리고 설사 [[소론]]과 [[남인]]이 공동의 적인 [[노론]]을 정치적 약점을 이용해 박멸시켰다 하더라도 나중에는 권력을 잡기 위해서 서로 철천지 원수가 되어버릴 게 뻔하다. 이런 식으로 당파 내에서 분열과 대립이 일어나는 것은 정치 자체에서 매우 흔하게 벌어지는 보편적인 사례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